(인생의 선물) 정치학자 강상중④ ‘지문날인거부’로 만난 커다란 인연

August 09, 2012

미쓰기 가쓰미=三ツ木勝巳

 ― 1970년대, 한국은 박정희 대통령의 군사정권 속에서 민주화의 움직임이 커지고 있었다.

나에게 있어서는 질풍노도의 시절이었다. 대학원에 들어갔을 때 김대중 납치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대한 항의로 도쿄의 스키야바시(數寄屋橋)에서 단식투쟁을 하기도 했다. 석사 2학년이 돼서야 겨우 연구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박사과정을 끝마쳤지만, 일자리는 없었다.

― 그래서 독일유학길에 오른 것인가.

은사이신 와세다(早稻田)대학교의 故 후지와라 야스노부(藤原保信) 교수님께서 지인이 있는 서독의 에를랑겐 대학교에 진학할 생각이 없느냐고 추천해 주셨다. 어쩔 수 없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으나 유학 가길 잘했다. 1979년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가 크게 바뀐 해이다. 비행기로 경유했던 모스크바 공항의 화장실에 걸린 조잡한 휴지에서 구소련의 궁핍한 상황이 엿보였다. 이란혁명(이란이슬람공화국을 탄생시킨 혁명)이 있었고 영국에는 마가렛 대처 총리가 등장했다. 사회주의도, 세계대전 이후의 사회에 풍요로움을 가져다준 자본주의 시스템도, 유통기한이 다 된 상품처럼 전후사회를 지탱하고 있던 신화가 무너져 가는 것을 체험했다.

이슬람권이 현대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하는 시대였다. 기숙사에는 이란인 유학생도 있었다. 이란혁명 1주년 때는 다 같이 축하했다. 동독과 국교가 없었던 한국과 대만 국적의 유학생은 대학이 마련한 베를린행 버스투어에 참가할 수 없어서 안타까워했다.

1991년의 걸프전쟁을 계기로 대중매체에 얼굴을 내밀게 됐다. 독일 유학을 경험하기도 해서 걸프전쟁에 대한 의식이 강했다.

― 1년 반 정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해 결혼, 사이타마(埼玉)현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는데.

메이지가쿠인(明治學院)대학의 시간강사를 하고 있었다. 1980년대 중반, 사이타마 현 내에서 지문날인거부를 한 제1호로 보도됐다. 다양한 직업의 많은 사람이 지원해 주었다. 순수하게 인권문제로서 생각하는 사람, 타다 남은 학생운동의 불씨를 다시 지피려는 사람…. 이런저런 사람을 만나면서 내 안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 시기가 내게 있어 일본사회로의 ‘착상의 시절’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돌아가신 도몬 가즈오(土門一雄) 아게오(上尾)합동교회 목사님과의 만남이 큰 영향을 미쳤다. 목사님은 지역의 리더로서 국제교류와 평화운동에도 관여하고 계셨다.

―지문날인에 대한 결단은 어떻게 내렸나.

1년 후, 기한이 돼서 찍었다. 지문에는 상징적인 의미는 있었으나 구체적인 생활 속에서의 불리함이나 박탈감을 채우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거부해야 한다든지 이런저런 의견도 있었지만 아무리 노력했어도 결국 수감됐을 것이다. 하지만 다 같이 공부하면서 왜 이런 제도가 있는지, 식민지문제는 무엇인지 등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결단코 폭력적인 행위는 아니었으며, 일종의 불복종을 표시하는 의미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미쓰기 가쓰미=三ツ木勝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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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당시의 강상중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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